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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장

  쿠와트는 언제나 임브린의 맹목적인 헌신에 의심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이종異種으로써의 임브린에 대한 몰이해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믿음과 판단에 대한 불신 사이 즈음에 위치한 감정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옳았다는 것이 항상 기쁜 일은 아니다. 특히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드러났을 때는. 순수한 호의와 붉은 돌담으로 둘러 쌓인 영겁의 지옥을 마음 밖으로는 밀어낸 쿠와트는 상황의 지독함에 마른 입술을 핥았다. 피부에서는 여느 때처럼 짠 맛이 났다. 너무 지쳤다. 일단은 루프에 들어가기 전에 맡겨둔 돈을 되찾고, 집을 구해서 당분간은 푹 쉬어야지.
 '당분간'이라는 것은 몇 년을 의미한다. 쿠와트가 할로우 게스트가 된 건 아주 오래전이다. 가끔 루프를 습격해서 별식을 즐긴 뒤 자기 나름의 휴지기를 갖는 것도, 이를 위해 자금을 운용하는 것도 아주 오래된 세월을 거치며 일상으로 익숙해졌다. 그리고 앞으로는 지난 시간보다도 더 오랜 영원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벨라트릭스의 집에서 잃어버린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기억들도 파도가 밀려들듯 시간이 흐르면 한 때의 해프닝으로 잊혀지고 말 일이었다.

 하지만 그러기까지는 쿠와트의 옆에는 제 손으로 연신 머리카락을 흐뜨리며 뒷걸음으로 걷고 있는 동행인이 있었다. 많은 페큘리어를 보아온 쿠와트에게도 계단에서 맞닥뜨린 수인과의 만남은 인상 깊은 일이었다. 옆으로 걷는 게나, 거꾸로 뒤집어 헤엄치는 시노돈티스처럼 세상에는 정말로 다양한 페큘리어가 있는 것이다. 쿠와트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함께 지내는 동안은 페큘리어들과 대체로 잘 지냈다. 그러는 것이 나중에 사냥할 때 더 편하기도 하지만, 상대가 자신보다 약하고 어린 아이라고 생각하면 정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어서였다. 기만적인 농담이 아니라 임브린의 집에서 사귄 친구들과의 헤어짐은 늘 상 다소 괴롭다. 그래서 쿠와트는 더욱 관계를 잘 유지할 수 있었다. 어차피 그들에 대한 마지막 기억은 모두 똑같은 냄새와 맛이므로. 공포에 찬 아드레날린과 공막의 형태를 유지하는 콜라겐. 심해로 가라앉는 비늘과 생선가시와 같은 잔여물들의 반짝임.
  "나 이 손 계속 잡고 있어도 돼? ...그러니까 지금 말고도 계속.. 어쩌면 영원히?"
 그러므로 그렇게 입을 연 상대가 영원을 함축하고 있는 할로우라면 모든 관계는 전혀 다른 것이 되어야 했다. 공생을 위해선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상대는 어떤 습성을 가지고 있고, 나는 어떤 습성을 취할 것인지. 쿠와트는 루프안에서 자신이 했던 질문을 다시 떠올렸다. 열하루는 충분한 기간일까. 처음으로 처음으로 어떤 해양생물이 되어야할지 모르게 된 밤이 쿠와트의 입 안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쿠와트는 언제나 조심스러웠다.
"…영원을 쉽게 약속할 수는 없어. 게다가, 이런 일들이 지나서는. 생각하고싶지 않아서."
 두 사람중 누가 발걸음을 멈췄는지는 몰랐다. 그 탓에 쿠와트의 지느러미를 쥔 수인의 손이 걸렸다. 수인은 뒤를 돌아서 있는 탓에 표정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잡아도 되냐고 먼저 물어오고, 계속해서 잡고있어도 되는지 묻는 손은 그대로 쿠와트를 붙잡고 있었다. 지느러미를 붙잡인 채로는 헤엄칠 수가 없다. 쿠와트는 자신이 잃어버린 수십 회의 기억 속에서 탈출에 실패한 루프들에 비해 비로소 여기까지 나올 수 있었던 이유가 궁금했다. 이 손이 해안가로 밀려드는 물결처럼 자신을 떠밀어준 것일지.
 그래서 쿠와트는 아주 오랜만에 심해가 아닌 다른 것을 상상했다. 자신을 바다소년이라고 부르는 잔 물결과, 목에서 천천히 젖히는 아가미와, 입안에 눈알의 맛이 아니라 쪽지와 함께 남겨준 사과 한 알의 맛을 남길 수 있는 동행.
"아, 저기. 그냥, 함께 지내는 거라면 괜찮은데. 같이 갈래?"
  바다에는 언제나 들 자리가 더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