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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구멍과 씨앗

"Yanira" -Ibeyi



 락슈미가 무너지고 나서도 운트케르만 산맥에는 봄이 늦게 찾아왔다.


 익히 알려졌듯이, 80여 년 간 제국 영토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한 크고 작은 나라들의 전쟁이 이어졌다. 이유는 다양했다. 제국에 빼앗긴 땅을 되찾기 위하여. 특정한 종족에게 의미 깊은 곳이기 때문에. 아직도 박해받는 자들을 해방하기 위하여. 그것이 명분이든 진실이든 모르구이에게는 그리 중요치 않게 느껴졌다. 모르구이의 선조는 그 혈족 전체가 락슈미 제국의 노예였다. 사자처럼 힘이 세고 염소처럼 끈기 있으며 양처럼 주어진 길을 따르니 어떤 노역에도 어울립니다. 여느 동물과 달리 두 개가 달린 머리는 온갖 궁금증을 자아냈고 오랜 문헌에는 하나의 머리를 베고 다른 머리가 죽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리냐느니 두 머리 모두 고통을 느낄 수 있느니 하는, 지금으로서 보면 당연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를 확인해보자는 구실로 노예를 잔학하게 다룬 기록이 여럿 남아있었다. 그런 키마이라 수인들이 주인의 목을 베고 달아나 고산 평지를 개간하고 자신들의 도시를 새웠다. "우리는 타고난 모반자이고 개척자이며 이 피로 정당한 우리의 권리를 되찾고자 하였으니 모든 머리가 자의로 내린 선택에는 의심이 없다." 시의회에 걸려있는, 이제는 낡아빠진 휘장에도 그렇게 직조되어 있지 않던가. 운트케르만의 시민들에게 도시는 영토와 정치체제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들의 피로 물들인 반석에 뿔과 이빨을 갈아 입증한 키마이라 수인으로서의 존재가치였다. 


 그런 이들에게는 어떤 온건한 지배도 협약도 만족스러울 리 없었다. 그들은 다른 국가가 지정한 어떤 구획도 제도도 거부했고 무장투쟁도 불사했다. 오직 분리독립만을 원했다. 100세에 가까운 모르구이는 30여 년 전 평화 협정이 내리던 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전란 때는 결혼을 이르게 하고 아이를 남기고자 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전장에서 죽더라도 결코 걱정하지 마라, 운트케르만에서는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가 시민을 양성한다. 공동체는 모든 아이를 반드시 굽어 돌본다.) 당시 모르구이는 어엿이 자란 손자를 여럿 두고 있었다. 이웃과 친척들은 공동거실에 모여 앉아 회담의 결과를 초조히 기다리고 있었다. 적지 않게 나이 먹은 모르구이의 둘째 딸이 행주로 흐리고 흠집이 가득한 수정구를 연신 닦아 댔다. 마치 그렇게 하면 수정구가 더 또렷이 통신 되기라도 할 듯이. 하지만 회담은 예상보다 길어졌고 준비한 내용이 다 떨어져 이 회담이 얼마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것인지만 반복해서 읊어대던 방송마저 픽 하는 소리와 함께 꺼져버렸다. 십수 쌍의 머리가 불만 어린 탄식을 내뱉으며 발을 탁탁 굴러댔다. 마법도구 기능사 자격이 있는 모르구이의 손자며느리 되는 이가 들여다보고 주문을 빌어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집으로 들어왔던 벌 한 마리가 나가지 못하고 창문 가에서 윙윙대는 소리만 크게 울릴 따름이었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나가서 다른 구역회관에 귓동냥 좀 하자고 하자. 그보다는 한 사람이 귀를 댄 채 다른 사람들에게 읊어주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나올 때 즈음, 이제 막 갈기가 자라기 시작한, 그러나 얼굴은 아직 앳되기 그지없어 우스꽝스러운 인상의 숫키마이라 하나가 입구 대신 막아놓은 쇠구슬 커튼을 쩔렁 열어젖히고 너무 많이 소리치고 다녀서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운트케르만의 독립이 인정되었대요!!"


 수십 마리 몫은 족히 될 포효와 울음소리가 공동회관을 먹먹히 뒤흔들었다. 몸집은 작아도 목청이 큰 작은 시누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회담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소일거리 삼아 손질하려고 무릎에 올려두었던 바구니에서 과육들이 와르르 굴러떨어졌다. 방바닥으로 흩어진 열매들이 발굽에 걷어채고 밟히면서 붉고 검은 곤죽이 되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누군가는 울고 서로를 부둥켜안았고, 누군가는 환희에 찬 소리를 지르면서 길거리로 달려나갔다. 모르구이의 한쪽 다리를 대신하는 의족에도 무른 열매 하나가 터지면서 달콤시큼한 향이 났다.


 그때도 나이가 적지 않았지만, 그때보다 더 깊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주름과 희어진 수염을 지닌 모르구이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나무 위에서 새까만 얼굴 한 쌍이 자신이 던진 열매가 어디를 맞추었나를 확인하기 위해 삐쭉 튀어나와 있었다. "나흐안, 요 벼락 맞을 말썽쟁이!" 열살 먹은 모르구이의 손녀는 집안의 가장 큰 머리인 증조할머니가 자신을 절대 혼내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지을 수 있는 웃음을 지으면서 나무를 타고 미끄러져 내렸다. 나흐안은 모르구이의 증손자들 가운데 첫째였고 아르고시아 구역 내에서는 평화 협정이 맺어진 후의 첫 세대라고 불릴만한 아이들 중 하나였다. 흑염소 머리는 흔하지. 하지만 사자 머리까지 검게 나기는 흔치 않아. 모르구이는 이것이 봄과 함께 찾아오는 특별하고 좋은 징조라고 생각했고 나흐안을 검은 둥이라고 불렀다. 아이는 똘똘했고 손톱을 잘못 깎아 얼굴에 상처가 난 주제에 그걸 가리키면서 자기는 얼굴에 상처가 있던 도시 전설 속의 인물처럼 강하노라고, 그러니 자기가 더 먼 짚공 골대를 가져야 한다고 친구들에게 우기는 못 말리는 허풍선이었다. 모르구이는 이 맹랑하고 사고치기 좋아하는 아이의 손을 잡고 미장사에게 데려갔다. 우리 집안의 귀한 손녀, 반으로 접힌 귀가 서기도 전에 남의 뿔을 잡아빼놓을 장난꾸러기, 크게 다치는 일 없도록 이마와 옆머리 가장자리 털을 하얗게 물들여 주소. 모르구이의 다섯째 손녀, 그러니까 나흐안의 셋째 이모 되는 사람은 아이를 그렇게 버릇없이 기르면 못쓴다고 했다. 시대가 이제 옛날 같지 않아서 유전학이니 뭐니 하는 것들이 다 밝혀냈는데, 식구에 없던 검은 털이 태어나는 건 그냥 예전에 있던 피가 지금 섞여 나오는 거라고, 그런 말로 안그래도 가만히 있질 못하는 애를 부추겨서 좋아질 게 뭐 있느냐고 했다.


 "그러지 마라. 이 애가 내 귀여움을 받아봤자 얼마나 더 시간이 있겠느냐?"


 그 말대로 한 눈의 모르구이, 영원히 집 안을 호령할 것 같았던 나흐안의 증조할머니는 차차 깨어있는 시간보다 죽은 듯이 잠자는 시간이 길어졌다. 새로운 아이들이 태어났으므로 집안에서의 나흐안을 향한 관심도 자연스레 수그러들었지만 그런다고 아이의 성질도 수그러들어야 한다는 법도 없었다. 나흐안, 증조할머니의 검은 둥이, 봄의 특별한 징조는 셋째 이모 말마따나 버릇이 단단히 잘못 들어버렸는지 여전히 돋보이고 싶어했다. 주변 또래들도 머리가 점차로 굵어져 갔으므로 이전처럼 속여먹이고 놀래키는 것은 점점 어려워졌지만, 그것이 나흐안을 낙담하거나 불행하게 하는 일 따위는 결코 없었다. 나흐안은 성적이 좋았고 운트케르만의 이야기에 깊은 관심을 지닌 만큼 바깥의 세상 역시 궁금해했다. 주변을 집어삼킬 기세로 궤적을 그리며 움직이는 검은 구멍. 다른 종족과 구분되는 뚜렷한 특이점을 지닌 키마이라, 반사된 달을 통해 핏속에 한 줌의 햇빛이 흐르는 동물된 사람들. 새로운 지식과 경험을 갈구하는 이 어린 한 쌍의 머리에게 아카데미 이그드라실보다 좋은 곳은 없었다.


 그곳에서 나흐안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룬 도시 전설들을 다른 아이들의 어린 시절을 만든 눈과 바다, 그리고 문이 굳게 닫힌 대궐 같은 이야기들과 견주어보고 비추기도 하면서 다른 이들을 이해해 나갔다. 사실은 우리 모두가 그렇다. 자신이 알던 세상을 기준으로 나머지 세상을 알아 가는 것이다. 다만 그렇게 해서 파악하기는 좀 어려운 분야도 있었다. 운트케르만에서 다른 지식과 마찬가지로 외세의 압력에도 귀하게 지키고 전수되기는 했어도 뭐 때문에 이런 걸 하게 되었는지 뚜렷한 이유를 들어보지는 못한 자신의 전공이 그랬다. 어떤 이들은 힘을 길러 수호나 격파에 쓰고 어떤 이들은 대가를 지불하고 원하는 것을 얻으며 어떤 이들은 필요한 것을 고치고 만든다. 나흐안은 자기가 공부하기로 마음먹은 이 재주의 존재 가치가 뭐인지 몰라도, 또 자기 학년 중에는 다른 사령술사가 없어도 방학마다 좋은 책을 보내주는 학우와 저 악한 혼혈왕 이전의 시대를 가르쳐줄 선생들이 있어서 나름대로 자기만의 연구를 해나갔다. 그러던 중 등장한 구더기가 들끓는 토끼 대왕은 나흐안의 허기진 구멍 속으로 쏟아져들어온 맛깔스러운 접시와도 같았다. 모든 전설 속의 인물에게는 궁극의 숙적이 있지 않았냐 말이다. 일단 주어진 단서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 나자 이다음에는 뭐가 더 없을까 끊임없이 안달이 났다. 이 어두운 역사와 부서진 별이 뭔지는 몰라도 지금 이렇게 나와 만나게 된 이유가 있겠지. 나만 할 수 있는 일이 있겠지. 이 뻔뻔하고 자기를 아끼고 어떤 일이 터지기를 바라온 나흐안 미슈가니가 이해하는 것은 그 정도뿐이었다. 본받을만한 좀 다른 사령술사가 있다면 좀 달랐을까? 그것은 영원히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