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드라이트가 무대 위를 비춘다. 백팔십센티미터에 늘씬한 청회색 양복을 빼입은 젊은이, 아니 풋내기가 양손을 주머니에 꽂아넣고 왼쪽다리에 체중을 실은체 삐뚜름하게 서있다. 자세를 고쳐 바로 서면서 구둣발을 두어번 구르자 밑굽에 징을 박아넣은듯 경쾌한 소리가 무대를 울렸다. 포마드로 말끔하게 빗어넘긴 짙은 암갈색 머리가 조명빛에 번들거리고, 쪽 가른 가르마가 희다. 청년은 주머니에서 뺀 손을 보이지 않는 청중을 향해 들어올려 두 팔을 반즈음 벌린 채, 완벽하게 고른 새하얀 치열을 드러내며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홀웨이를 울렸다.
"안녕하세요! 신사·숙녀·그리고 불운하게도, 어느쪽도 아닌 여러분! 자, 제 멋진 신발 좀 보세요! 아주 근사하죠(fabulous)? 그래요! 그게 접니다! 패비! F-a-b-b-i. y가 아니라구요. 왜냐면 y는 엉터리 글자거든요. 모음인지 자음인지도 모르겠잖아요. 그리고 전 이탈리안이니까요. 제가 듣기론 모든 천사들은 조금씩 이탈리안이라던데요. 그렇잖으면 레오나르도, 미켈란젤로, 라파엘, 도나텔로, 이런 친구들이 왜 죄다 이탈리아 출신이겠어요? 제가 그럼 닌자거북이 얘기나 하려고 여기 나온 줄 아셨어요? 그러니까 모음으로 끝나야죠. 델가'도' (DelgadO), 카스텔루치'오'(CastelucciO), 피'자'(PizzA), i로 끝나는 패비. 이렇게 말하는 느낌이죠. "이게 바로 나야." 그리고 만약 그게 싫다? 그럼 가서 혼자 좇뱅이나 치시지!"*
짝! 얼굴이 돌아갈만큼 제 스스로의 뺨을 세게 갈긴 뒤 "저런, 패비! 그런 욕을 쓰면 안되지!" 하고 스스로를 타이른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말을 술술 이어나갔다. "이즈음 되면, 저자식 순 또라이 아냐? 라고 생각하실 분들이 있단 것, 압니다. 하지만 전 이 마루를 반들반들하게 닦아 놓은 자루걸레짝만큼이나 제 정신입니다. 농담이 아니에요. 검사도 받아봤다구요! 그치만 우리들끼리만의 얘기니까, 좀 더 솔직해지자면, 제가 만약 인간이였다면 조울증이나 분노조절장애 판정을 받고 말았을 겁니다." 이 대목에서 패비는 목소리를 살짝 낮추고 검지손가락을 슬쩍 들어올려보였다. "하지만 저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그는 다시한번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미소지었다. "검사결과를 슬쩍 바꿔버렸습죠. 그 결과 저, 패비는 100%!!!!!! 정상인이란 말입니다!"
"여러분, 박수 갈채를!!!" 패비가 두팔을 활짝 들어올리자, 실제로 관객석에서는 우레와 같은 박수 갈채와 휘파람이 튀어나왔다. '윗쪽'이든 '아랫쪽'이든, 그가 권능을 이딴 데다가 써먹고 있는 걸 알았다면, 원칙적으로는 당장에라도 멱살이 잡힌 채 질질 끌려들어가 볼기짝을 맞아도 모자랄 일이였지만, 어느 모로 보아도 모두에게 불운하기 짝이 없었던 세기말을 넘긴지 20년도 채 지나지 않은 이 마당에 천둥벌거숭이 하나가 좀 과하게 날뛴다고 시시콜콜하게 걸고 넘어갈 인력은 어느쪽에도 남아돌지 않았다. 게다가, 패비가 언젠가 말한대로, 이 권능을 부여한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는 그야말로 "신만이 아시"지 않겠는가?
* 뮤지컬 <Jersey Boys>의 대사 인용.
[리차드 / 추천하는 뮤지컬, 연극이면 더 좋구요]
패비는 생각에 잠겨 턱을 오른손으로 쥔채 검지로 아랫입술을 쓸었다. "가장 최근에 본 연극은 레미제라블이였는데, 그동안 영화며 뮤지컬로 레미제라블을 여러번 봐왔건데 이번 연극은 그다지 추천할만한 것은 못되더군요. 뮤지컬이라면 노트르담 드 파리는 어떨까요. 추락한 부주교가 나오지요." 다음 순간, 그는 어쩐지 약간 메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곱사등이 추남도 나오구요. 「아, 저 모든 것을 나는 사랑했었는데!」*"
* 소설 <노트르담 드 파리>에서, 곱사등이 콰지모도의 마지막 대사 인용.
[판 윌셔/여기 세상에 잇으면서 제일.. 기억에 남은 일은 어떤거였습니까?]
"제일 기억에 남은 일이라." 패비는 엄지와 나머지 손가락을 붙였다, 떼었다, 깜빡이는 손 시늉을 했다. "밤하늘 가득 불꽃놀이용 폭죽이 터지는 기분이네요. 펑, 콰쾅! 아시겠지만, 이쪽에서 휴가 보내자고 겨우 한두 해만 머물렀던건 아니잖아요. 지금 제 뇌는 어떤 대답을 해야 좀 더 '있어 보일지' 팽팽 돌아가고있는데요, 멀미가 날 지경이니 아무렇게나 말해보죠. 판 형제님과 마주보고 있는 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 '현재'가 저의 가장 선명한 기억인거에요. 어때요?" 그렇게 말하는 그는 퍽 흡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셀레스티 / 좋아하는 차가 뭐야? 아, 디저트는?!]
"사실 제가 좀 무식한 놈이라, 차라는건 다 뜨거운 물에다 식물 한 주먹 넣고 우려낸거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걸 무슨 재미로 마셔? 한동안 그렇게 생각했죠. 신의 최후의 야심작이란 인간도 한꺼풀 거죽을 벗겨보면 다 똑같은 고깃덩어리인데, 차, 좀 차려입었다 싶은 놈들은 국가를 불문하고 홀짝여대는 그놈의 차라고 뭐 별거 있냐는거죠. 그러다가 국화차를 마셔봤는데, 흠, 이게 맛이 좀 떫으면서도 깔끔하고, 향도 괜찮고, 나쁘지 않더군요. 제가 나쁘지 않다고 함은, 꽤 좋아한다 이말입니다. 소위 운치라는걸 느끼게 해준달까요. 국화꽃 대가리를 똑 떼다가 띄워놓은 것도 맘에 듭니다. 것보다 디저트로 말하자면, 먹는거라면 뭐든지 환영입니다!" 악마는 두 손을 싹싹 비비며 혀로 아랫 입술을 핥는다. "거, 이렇게 말씀을 꺼낸건 형제님이 언제 한번 대접해주시겠다는 거겠지요?"
1994년 11월 27일, 글래스고.
제가 천국으로 가는 에스컬레이터에서 재수없게 발을 헛디뎌서 굴러떨어지는 바람에 늙은이 닉의 굴다리 밑에 쳐박혀 버린건 어디보자, 겨우 반세기 전이였어요! 1945년 7월의 어느날이였죠.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기 보름 전즈음이였을까요? 제 '전 직장동료'라는 작자들이 그럽디다. "한달만 참지 그랬어, 패비. 딱 2주면 그 미친짓들이 죄다 끝나고 인류애가 서서히 회복되어 가는 역사와 광명을 새벽빛의 희망 속에서 찾을 수 있었을텐데." 개소리죠? 물론 그 때 제 이름은 패비가 아니였지만 말이에요. 뭐였더라? 파브르? 페이블? 푸아그라? (그는 한 손으로 이마를 탁 치면서 그을음인지 뭔지 별로 알고 싶지도 않은 것들로 새까매진 얼굴과 대조적으로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미안해요, 친구. 정말 기억이 나질 않는군요. 뭔가 페이비언 주의자 같은 이름이긴 했어요. 물론 이런건 그나마 온후한 쪽에 속했고, 이딴 말을 지껄이는 놈팽이도 있었죠. "내 저녀석이 언젠가 저럴줄 알았지. 이럴줄 알고 있었다니까." 개새끼! 그게 천사라는 놈이 친구한테 할 소리야? 진짜에요. 천사라구 다들 바르고 착한 놈들도 아니거니와, 악마들이라고 죄다 되바라진 것도 아니라니깐요.
아무튼, 내가 그무렵엔 정말로 정신이 좀 헤까닥 했는진 몰라도 사리분별은 할 줄 아는 놈이였고, 짚고 넘어갈 건 넘어가자는 주의이기 때문에, 그건 세계 대전이랑은 각다귀 다리 한짝 만큼도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말했죠. 이건 너네가 생각하는 그딴게 아니라고. 그치들은 다만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이렇게 말하더군요. "불쌍한 패비! 천국에서 떨어진 충격으로 맛이 갔군."
젠장, 원로천사들은 이렇게 말하더군요. "예수 그리스도 재림 이후에 태어난 천사들이란! 요즈음 애송이들은 아주 엉망이야. 나때는 말야…" (그는 침을 찍 뱉었다) 이빨까지 말라 그래요! 그래서 루시퍼께서 천국의 인구를 반이나 데리고 아래로 내려가셨답니까? 말들 하는거 하고는! 아는 치들은 다 아는 이야깁니다. 다들 쉬쉬하고 있어서 그렇지. 제가 어디까지 얘기했죠?
(세계2차대전이요.)
맞아요. 똑바로 적어둬요. 그 당시에 망할 늙은이들이 천국에서 편안하게 엉덩이 붙이고 앉아 관망이나 하고있는 동안 전 그 똥통 속을 실제로 뛰어다녔단 말예요. 상상해보세요! 전장 한 가운데서, 낮에는 개머리판으로 머리통들을 후려치면서 죽어라 뛰어다니고, 밤에는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살려놓고 신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을까 머리빠지게 고민하는, 신출내기 병사로 위장한 신출내기 천사들을 말이에요. 왜 그런 이야기 들어보셨지요? 총탄이 딱 가슴앞주머니에 넣어놓은 포켓판 성경에 박혀서 목숨을 구한다거나, 십자가 목걸이가 별안간 끊어져서 그걸 주우려고 고개를 숙였더니 마침 총알이 꼭 머리가 있던 위치에 날아가 박혀서 그 때 몸을 굽히지 않았더라면 죽을뻔 했다던가, 그런 이야기 말이에요. 그런 기적을 만들어 내는게 우리였지요. 물론 내 몸 하나 보전하기도 벅찬 곳이였죠. 죽더라도 새 육체를 지급받으면야 그만이라지만, 아픈건 아픈거잖아요? 지뢰를 밟아 온몸이 산산조각 난 뒤 얻은 쓰디쓴 교훈이였죠. 그도 그렇지만… 참호 속에서 크리켓 이야기를 나누던 전우가 다음순간 내가 어찌할 도리도 없이 쓰러지고, 빌어먹을, 죽은 인간은 천사의 권능으로도 살려낼 수 가 없답니다. 그 친구는 누이가 셋이였는데. 전쟁이 끝나고 나면 그 중 한명을 나한테 소개시켜 주겠다나요. 죽지도 않는 나를 구하기 위해 수류탄 위에 대신 몸을 던졌던 멍텅구리는 또 어떻구요? '죽음'은 그들의 영혼을 어린아이인양 안아들고 사라지면서, 줄곧 저한테는 눈길 한 번 안주더군요. 아직도 그목소리들을 잊을 수가 없어요. 천사는 잠들지 않고, 밤은 길고, 그러면 원래 쓸 데 없는 생각들이 들기 시작하는 법입니다. 왜 떨어지는 천사는 있는데 올라가는 악마는 없을까요? 이 모든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은 무엇일까요? 애초에 그런 질문이 존재하기는 할까요? 도쿄 대공습 이후에는 상부에서도 제가 좀 불쌍해 보였는지, 아니면 일의 능률을 높이기 위해서인지, 아무튼 좀 쉬라고 그러더군요. 그래서 그렇게 했습니다. 다리 위에서 강 속으로 뛰어내려 삶을 포기하려는 사람들을 붙잡고 이야기도 좀 들어주고, 삶에 대한 희망을 되찾아 주는 거지요. 그러다가 7월이 왔습니다.
하늘은 티끌 한점 없이 맑고, 강물 위로는 여름 햇살이 눈이 아플만큼 반짝거리더군요. 그리고 정말 예쁜 아가씨가 하나 있었습니다. 두 맨발은 반즈음 허공에 떠있고, 벌린 두 팔로는 난간을 붙잡은 채였습니다. 배는 산만큼 부풀어 있었구요. 아가씨 어머니는 아가씨를 낳자마자 도망갔고, 술주정뱅이 아버지한테 맞으면서 자랐고, 아직도 그 영감한테 맞아가면서 같이 살고 있댑니다. 아이 아빠는 일하는 공장의 작업반장이래요. 그런데 일주일 전에 그러더랍니다. 사실은 자기, 아내도 있고 아이도 둘이나 있으니 책임져줄수가 없다구요. 동네 사람들은 죄다 자길 갈보 취급하고. 에이즈 판정까지 받았댑니다. 이래도 제가 살고 싶겠어요? 아가씨가 하도 울어서 벌겋게 된 눈자위로 나를 쳐다보는데, 빌어먹을, 아무 생각도 안나는 겁니다. 아가씨 바로 뒤에서 여름 해가 후광처럼 빛나는데, 햇살이 너무 따가웠어요. 눈이 너무 아파서 아가씨를 제대로 쳐다보기조차 힘들었다구요. 머릿속은 새하얗고, 아가씨가 입은 치마도 정말로 하얬는데, 정말인지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어요. 입에서 생각지도 않은 말이 튀어나가더군요. "그러게요." 그말이 제 입술에서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 아가씨가 난간을 놓더랍니다. 어쩌면 자의가 아니였을지도 모르지요. 하도 오래 거기 서있어서 그냥 팔힘이 빠졌던걸지도 몰라요. 아무튼 그 아가씨가 우아하게 하얀 새 한마리처럼, 팔을 쫙 펴고, 강물 속으로 떨어지는데, 제기랄, 무슨 기적이든 발휘해서 그 아가씨를 구해냈어야 하는건데. 전 그냥 거기에 멍청히 서있었어요. 내가 방금 무슨 말을 한건지 생각하면서 말이에요. 거짓말처럼 수면이 금방 잔잔해지더군요.
(그는 술병을 들이켰다. 나는 붙박이처럼 가만히 앉아있었다. 그는 여전히 그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나를 흘깃 바라보더니, 벌컥 화를 냈다.)
이봐요, 무슨 얘기가 더 필요합니까? 이게 끝이에요!! 자살교사 및 방조죄. 그렇게 전 여기에 쳐박혔다구요. 천사가 추락하면 무슨 신성한 고리가 날아가고, 날개가 새까맣게 타버리는 극적효과라도 나타나는줄 아나 보죠? 아, 그래도 그제야 죽음이 나를 한 번 흘깃 쳐다보긴 하더이다. 하여튼 필멸자들이란! 끝이란 걸 볼 줄 몰라요. 물론 그게 당신네들 장점이긴 합니다. 회개하라! 끝이 다가왔다! 라고 쓰여있는 피켓을 들고 돌아다니는 거렁뱅이 종말론자들이나, 내일이란 없는 사람처럼 술이나 퍼마시는 나는 끝을 알지요.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거구요.
몇 년 전즈음에, 전우회인가? 아무튼 거기에 갔어요. 이유로는 별 건 없었고, 좀 취해있었죠. 지금처럼. 다들 머리가 하얗게 세고, 나프탈렌 냄새를 내면서 진력이라곤 모두 짜버린 절인 과일들처럼 안락 의자에 앉아있더군요. 내가 거기에 걸어들어가니까, 50여년 전과 꼭 같은 모습 그대로, 그네들은 모두 늙어버렸는데 나는 사진 속에서 갓 튀어나온 사람처럼 방에 들어서니까, 다들 할 말을 잃고 나를 쳐다보더군요. 그 중 하나는 나를 '죽음'이라고 생각했는지 심장이 거의 멈춰버리더군요. 좀 미안할 지경이였어요. 좀 섭섭하기도 했구요. 그래도 생사를 오가는 동안 동거동락했던 친구들이잖아요. 아무튼 그렇게 다들 입을 떡 벌리고 있는게 꼭 파리라도 한 마리 들어가면 그대로 삼킬 것 같더군요. 그러다가 한 명이 갑자기 소리를 내서 마구 웃는거에요. 너무 오래뛰어서 거품을 물고 쓰러지기 직전 발광하는 군마처럼. 그리고 한다는 말이. "내가 뭐랬어, 저녀석은 천사 아니면 악마일 거랬잖아." 맞아요, 그런 말을 했었죠. '종교상 양심적 병역 거부'를 구실로 총탄 한 알 안쓰고 무식하게 개머리판이나 휘둘러 대면서 전장을 뛰어다녔으니. 진짜 미쳤지.
소설의 영감을 얻겠다는 구실로 글래스고로 이주한 뒤 매일 술집이나 들락거리다가 나중에는 거리의 노숙자들에게 술을 한 병식 물려주고 이야기를 수집하던 모건 플래처는 결국 이 녹취록을 출간하지 못했다. 얼마지나지 않아 그의 거처가 화재로 소실되었기 때문이다.